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문단 편집) ===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 베시에르는 프랑스 남부 아키텐 공국의 케르시(현재의 로트주)의 프레사크(현재의 카오르 근처)에서 이발사, 외과의사의 장남(동생은 베르트랑 베시에르)으로 태어났다. 1786년에 루이 16세 시절 프랑스군에 입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한다. 그는 1791년에 국왕이 소집한 "Constitutional Guard"에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그는 대혁명기 때 혁명군에 남았고, 혁명 전쟁 기간 동안 피레네 동부 방면군과 [[모젤 강]] 유역 방면군에 복무하면서 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경력을 쌓아 1796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였다. 바로 이 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 모젤 군의 지휘를 맡아 [[이탈리아 전쟁#s-2|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로베르토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의 눈길을 끌었고, 나폴레옹의 대승리로 끝난 리볼리 전투에서 베시에르가 이끈 중대의 활약으로 인해 베시에르는 소령으로 승진했다. 리볼리 전투가 끝난 뒤 그는 [[프랑스군]]이 노획한 적의 깃발들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의 [[스티리아]] 침공에 참가했고, 거기서 정찰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JeanBaptisteBessieres-1792.jpg]] 1792년, 22세 시절 베시에르. 그 후 여단장으로 진급, 베시에르의 군사적 재능을 눈여겨 본 나폴레옹은 이후 이어진 전역들과 전투들에서 모두 베시에르를 부관으로 대동하고 갔다.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 당시에는 아크레 전투와 아부키르 전투[* 아부키르 해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아부키르 전투는 육지에서의 전투를 의미하며, 보통 아부키르 해전이라 불리는 전투는 나일 강 전투로 분류된다.]에서 군의 선두에 서서 1799년 5월 21일 아크레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이로 인해 준장이 된다. 하지만 아부키르 항에 정박되어 있던 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깨지면서 나폴레옹과 함께 발이 묶이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비밀 탈출 당시 그를 수행했고 유럽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제2차 이탈리아 전쟁|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 1800년의 마렝고 전투에서 통령 근위대[* 이후 나폴레옹의 '친위대'로 변경]를 지휘했으며 전투 후반에 기병 1개 연대를 이끌고 돌격하는 용맹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그의 성과는 1802년에 그를 중장이자 사단장의 직위에 올려놓았으며, 나폴레옹이 1804년에 황제의 관을 썼을 때 임명한 원수들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1805년의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부터 1807년에 [[독일.폴란드 원정]]이 끝나기까지 그는 프랑스 제국군 소속의 근위 기병대 전체의 지휘를 맡았다. 18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09년에는 이스트리아 공작의 자리를 받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ssi%C3%A8res-%C3%A0-cheval.jpg]] 베시에르의 기마상. 반도전쟁이 일어나자 스페인 전역에서도 다른 장군들과 함께 스페인 원정에 파견된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단독 지휘를 했고, 1808년 메디나 델 리오 세코 전투에서 숫적으로 그의 1만 4천 프랑스군을 압도하는 2만 천 명의 [[스페인]] 정규군을 갈아버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소모시에라 전투나 코루나 전투 등에서도 스페인군과 영국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다가 1808년에 발리엥에서 듀퐁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처절하게 발려버리자 나폴레옹은 친정을 결심, 그는 참모로 종군하여 나폴레옹을 충실히 수행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gram-Napoleon_and_Bessi%C3%A8res.jpg]] 1809년에는 다뉴브 강 유역의 대육군을 이끌고 다시한번 [[오스트리아]]군과 맞붙게 되었다. 하지만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기병]]를 몰아 몇 번이고 끊임없이 오스트리아군 본대에 끊임없이 돌격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총 공세를 막아내었고, [[바그람 전투]]에 참가하여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그가 타고 있던 [[말(동물)|말]]이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굴욕을[* 사실 기사도 정신 등이 남아있던 이 시대에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서 낙마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최전선에서 앞장서 싸웠다는 말이므로.] 설욕하라는 하늘의 뜻인지, 왈헤렌 섬에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베르나도트]] 원수를 대신해서 군대를 지휘했고, [[영국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냈다. 바그람 전투 직후, 베시에르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1811년, 베시에르는 다시 복귀하여 스페인의 [[앙드레 마세나|마세나]]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오랫동안 먼 곳에 보내기를 싫어했으며 베시에르가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주는 것을 선호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이즈음 들어 옛날의 기개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공주와 결혼하여 [[나폴레옹 2세|아들]]을 낳은 뒤, 나폴레옹은 아내 곁에서 오랫동안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페인 전역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데도, 그는 다시 직접 출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유능한 장수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베시에르를 붙잡아둔 것도 나폴레옹이 많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베시에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 1812년의 [[러시아 원정]]에서도 나폴레옹을 따라갔다. 근위 기병대를 지휘하여 보로디노 전투에서 그는 기병 돌격을 감행하며 러시아군 전열을 무너뜨렸고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본대가 공격 받지 않도록 기병대로 신중히 엄호했다. 하지만 얼마 뒤 나폴레옹 대신 원정군을 이끌었던 뮈라가 나폴리로 조기 귀국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원정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베시에르의 부대 역시 적의 추격과 추위, 굶주림 등으로 시달렸고,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만이 국내에 복귀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60px-Le_mar%C3%A9chal_Bessi%C3%A8res_et_son_escorte%2C_1813.jpg]] 이러한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1813년에 대불 동맹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베시에르를 프랑스 전 기병대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